1980

1982년 1번째 이미지
한국 프로야구는 81년 12월 11일 KBO 창립 총회를 열고 광주를 연고로 하는 해태 타이거즈, 서울의 MBC 청룡, 부산의 롯데 자이언츠, 대구의 삼성 라이온즈, 대전의 OB 베어스, 인천의 삼미 슈퍼스타즈 등 6개 구단으로 산뜻한 출발을 하게 된다. 위의 사진은 OB 윤동균 선수가 선서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1982년 2번째 이미지
타이거즈는 82년 1월 30일 해태제과 본사에서 박건배 구단주를 비롯하여 김동엽 감독과 코치진 및 14명의 선수로 창단식을 가졌다. 당시 타이거즈는 절대적인 선수 구성의 어려움을 겪은 끝에 6개팀 중 가장 적은 선수로 창단식을 치렀다. OB와 MBC에 이은 3번째 프로구단의 탄생이었다. 얇은 선수층으로 시작한 타이거즈의 82시즌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전기리그가 시작된지 불과 한달만에 초대 감독이었던 김동엽이 사령탑을 놓고 조창수 코치가 감독 대행직을 수행하는 등 난항을 거듭했다. 4월을 마감한 시점에서 5승 8패(5위)를 기록한 타이거즈는 6월 초반 김봉연 등 중심타자들의 맹활약으로 한때 5연승을 구가하며 선두권 진입을 위한 강한 의지를 내보인다. 하지만 박철순이라고 하는 불세출의 에이스를 보유하고 있던 OB베어스의 독주를 견제하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결국 OB베어스의 전기리그 우승을 지켜봐야만 했던 타이거즈는 절치부심 후기리그를 준비했으나 초반부터 연패를 거듭하며 후기리그가 시작된 지 한달 만에 선두와 4게임차로 벌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끝내 이 간격을 좁히지 못한 타이거즈는 38승 42패(4위)의 성적으로 원년 프로야구를 마감해야 했다.
1982년 3번째 이미지
투수 운영에 있어 현대야구는 선발, 중간, 마무리의 분명한 구분이 있지만 초창기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얇은 선수층 탓에 엄두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82시즌을 뛴 타이거즈 투수는 총 6명으로 그 중 5명이 1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페넌트레이스 총 80경기를 단 6명의 투수로 운영했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그런 상황에 누가 선발이며, 누가 마무리라 할 수 있었겠는가. 모두가 선발이자 중간계투요, 마무리였던 셈이다. 그 중에서도 김용남은 팀 내에서 가장 많은 175이닝을 소화해 9승 12패 방어율 3.09를 기록, 팀의 에이스 역할을 하였으며, 김성한과 강만식, 그리고 방수원, 이상윤 등이 그의 뒤를 받쳤다. (김용남)
1982년 4번째 이미지
전·후기리그 내내 뚜렷한 팀 성적을 거두지 못한 타이거즈였지만 타격만큼은 달랐다. 실업시절 3년 연속 홈런왕에 올랐던 김봉연이 22개의 홈런을 터뜨려 초대 홈런왕에 올랐으며, 김성한은 투수로서 10승5패로 다승 7위에 오르는 동시에 69타점으로 타점왕을 차지했고, 김일권은 53개의 도루로 초대 도루왕을 차지하며 대도 본색의 진면목을 발산했다. (82년 올스타전)
1982년 5번째 이미지
당시 박철순, 백인천 등 해외파들이 투타 전부문을 석권하고 있는 가운데 김봉연은 22개의 홈런으로 초대 홈런왕위에 오름으로써 한국의 간판타자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또한 그는 올스타 인기투표에서도 득표율 61%를 얻어 그의 폭발적인 인기도를 가늠케 했다. 우직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강한 손목힘과 몸 전체의 파워를 배트에 집중시키는 탁월한 능력으로 팬들을 매료시킨 파워히터 김봉연. 아마의 화려했던 명성이 프로 무대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며 화려한 성공 신화를 써내려 갔다.
1982년 6번째 이미지
엄연히 지명타자제가 채택되던 한국야구에 타이거즈는 과감히 지명 타자제를 포기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선수가 김성한이다. 투수로서 10승 5패(7위), 방어율 2.89(6위)를 기록했던 그는 타자로서도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타율 0.305, 홈런 13개(4위), 타점 69점(1위)을 기록하는 등 1인 2역을 완벽히 소화 해냈다. 타고난 펀치력을 자랑했던 김성한이 타격에만 전념했더라면 훨씬 더 좋은 성적이 기대되었으나 그 누구보다 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개인 기록보다 팀 성적을 위한 성숙된 모습 보였다.
1982년 7번째 이미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야구를 배워 갖고 나왔다는 평을 들은 김일권은 호랑이 유니폼을 입고 도루왕이라는 타이틀로 이름값을 했다. 특히 7월 18일 대 OB베어스와의 경기에서 한 경기 5개의 도루를 성공시키는 등 '그라운드의 대도'로서 손색이 없는 활약을 펼쳤다. 김성한이 초대 타점왕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김일권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1982년 8번째 이미지
소리없이 강하다! 배트 중심에 잘 맞았다 싶은 공도 어느새 그의 글러브 속으로. 호리호리한 체격을 소유한 차영화는 도루를 32개(5위)나 기록했을 만큼 빠른 발을 소유한 덕분으로 화려한 내야 수비를 뽐낼 수 있었다. 팀내 내야수비를 조율하며 2루수로서 75게임에 출장, 단 5개의 실책만을 기록한 차영화는 수비 평가의 바로미터라고 할 수 있는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2루수 부문 수상의 기쁨을 맛보며 멋지게 원년 시즌을 장식했다.
1982년 9번째 이미지
유일하게 수비율 기록으로 주인공을 가린 제 1회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영광의 수상자들이 트로피를 들고 한껏 포즈를 취하고 있다. 뒷줄 오른쪽 맨끝이 김준환 선수, 앞줄 맨 왼쪽의 차영화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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